애플 ‘비전 프로’의 뼈아픈 부진과 스마트 안경으로의 선회… 공간 컴퓨팅의 미래는

f4612644385ff33807a525eb4caf642b.jpg

싸늘하게 식어버린 시장 반응과 생산 축소

애플이 야심 차게 내놓았던 확장현실(XR) 헤드셋 ‘비전 프로’가 시장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2024년 첫 출시 당시만 해도 아이폰을 이을 차세대 혁신 기기로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기대를 모았지만, 현실은 꽤나 냉혹하다. 파이낸셜타임스와 IDC 등 주요 외신 및 시장조사기관에 따르면, 위탁 생산을 맡은 중국 럭스쉐어는 2024년 39만 대를 출하한 이후 작년 초부터 사실상 기기 생산을 멈춘 상태다. 당장 눈에 띄는 판매 부진이 주된 원인이다. 2025년 4분기 기준 출하량은 고작 4만 5000대에 그칠 것으로 예상되며, 크리스마스 시즌을 포함한 해당 분기 매출이 1억 5700만 달러를 기록했음에도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애플의 ‘보기 드문 실패작’이라는 꼬리표가 붙고 있다. 게다가 센서타워 집계 결과, 애플은 올해 미국과 영국 등 핵심 시장에서 비전 프로의 디지털 광고 집행 예산을 95% 이상 대폭 삭감했다. 시장에 나온 지 2년이 훌쩍 넘었지만 애플조차 이 기기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한 모양새다.

흥행 실패를 부른 뚜렷한 한계점들

기기 자체가 가진 태생적인 단점들이 발목을 단단히 잡았다. 499만 원이라는 진입 장벽이 너무 높은 데다, 600g을 훌쩍 넘는 육중한 무게는 사용자들에게 큰 피로감으로 작용했다. 심지어 지난 10월 M5 칩을 탑재해 새롭게 선보인 모델은 무게가 750g까지 늘어나며 오히려 시장의 외면을 받았다. 하드웨어의 아쉬움뿐만 아니라 기기를 통해 즐길 수 있는 콘텐츠도 턱없이 부족하다. 넷플릭스나 유튜브 같은 필수 앱들이 전용 버전으로 지원되지 않아 사파리 브라우저를 거쳐야만 하는 불편함이 치명적이다. 일각에서는 애플 스토어의 소극적인 마케팅 방식도 도마 위에 올랐다. 매장에서 진행된 비전 프로 데모 체험이 실제 구매로 매끄럽게 이어지지 못한 배경에는 애플 특유의 원가 절감 기조가 낳은 한계가 있었다는 지적이다. 카운터포인트 리서치에 따르면 가상현실 헤드셋 전체 시장 규모마저 전년 대비 14% 쪼그라들 전망이라 외부 환경 역시 녹록지 않은 상황이다.

‘스마트 안경’으로 눈을 돌린 궤도 수정

결국 애플은 전략의 궤도를 대대적으로 수정하기에 이르렀다. 당초 2027년 출시를 목표로 기획했던 보급형 경량 헤드셋의 전면 개편 작업을 잠정 중단하고, 그 대신 자원과 인력을 ‘스마트 안경’ 개발에 집중하기로 가닥을 잡았다. 블룸버그 통신은 현재 애플이 최소 두 가지 형태의 스마트 안경을 은밀히 연구 중이라고 보도했다. 이는 폼팩터 주도권을 쥐기 위해 발 빠르게 움직이는 경쟁사들에 대응하기 위한 필수적인 행보이기도 하다. 이미 메타는 2021년부터 레이밴과 손잡고 스마트 안경 시장의 파이를 키워왔으며, 지난 9월에는 인공지능과 디스플레이 기술을 결합한 ‘메타 레이밴 디스플레이’를 앞세워 한발 앞서가고 있다. 구글 또한 자사의 생성형 AI 모델 ‘제미나이’를 이식한 AI 안경을 올해 안에 선보이겠다고 선언하며 경쟁에 불을 지피고 있다.

공간 컴퓨팅의 불가피성, 남은 과제는 타이밍

이러한 뼈아픈 성적표에도 불구하고 애플의 최고위급 임원들은 공간 컴퓨팅이 가져올 미래에 대해 굳건한 믿음을 보이고 있다. 최근 IT 매체 톰스 가이드와의 인터뷰에서 그레그 조스위악 월드와이드 마케팅 수석 부사장은 디지털과 현실 세계의 결합은 결코 피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비전 프로가 두 세계가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 그 미래를 미리 엿보게 해준 상징적인 기기라며, 공간 컴퓨팅이 완벽히 대중화되는 정확한 시기를 특정하긴 어렵지만 그 방향성만큼은 명확하다고 덧붙였다. 차기 CEO로 가장 유력하게 거론되는 존 터너스 하드웨어 엔지니어링 수석 부사장 역시 애플 본연의 철학을 거듭 확인시켰다. 단순히 새로운 기술을 시장에 던져놓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그 기술을 지렛대 삼아 사용자에게 어떤 놀라운 제품과 경험을 선사할지 끊임없이 고민한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 시절부터 팀 쿡을 거쳐 20년 넘게 이어져 온 이 확고한 기조가 스마트 안경이라는 새로운 캔버스 위에서 언제쯤 대중의 마음을 완벽히 사로잡을 수 있을지 업계의 이목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