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의 이중 전략: ‘AI 거품론’ 정면 돌파와 조직 체질 개선
젠슨 황 엔비디아 CEO가 최근 사내 회의에서 현재 회사가 처한 상황을 두고 “승산이 없는 게임(no-win situation)에 놓여 있다”며 복잡한 심경을 토로한 사실이 알려졌다. 엄청난 실적 성장세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제기되는 ‘AI 거품론’ 탓에 시장의 평가가 지나치게 가혹하다는 진단이다. 젠슨 황은 지난 20일 직원들에게 “우리의 실적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거품이 꺼지는 증거로 간주되고, 반대로 실적이 좋으면 거품을 더욱 부추기는 것으로 해석될 것”이라며 답답함을 내비쳤다. 조금이라도 시장의 눈높이를 맞추지 못할 경우 마치 세상이 무너질 듯한 반응이 쏟아질 것이라는 우려 섞인 발언도 덧붙였다.
역대급 실적 속 위기감 고조
이러한 CEO의 발언은 엔비디아가 기록적인 성과를 내고 있는 와중에 나왔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로 엔비디아는 지난 19일 발표한 2025 회계연도 3분기 실적에서 전년 동기 대비 62% 급증한 570억 1000만 달러의 매출을 달성했다. 특히 데이터센터 부문은 전체 매출의 90%에 달하는 512억 달러를 기록하며 회사의 성장을 견인했다. 회사 측은 이에 그치지 않고 블랙웰과 루빈 아키텍처를 통한 매출이 2026년 말까지 50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는 장밋빛 전망까지 내놓은 상태다. 그러나 엔비디아 측은 젠슨 황의 이번 발언에 대해 직원들이 시장의 소음에 동요하지 말고 본연의 업무에 집중하라는 취지였다고 공식 입장을 내놓으며 내부 결속을 다지는 모습이다.
창사 이래 첫 CMO 선임, 구글 출신 영입
이처럼 시장의 불확실성이 커지고 회사의 덩치가 비대해지는 시점에 엔비디아는 마케팅 조직의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했다. 엔비디아는 창사 이래 처음으로 최고마케팅책임자(CMO) 직책을 신설하고, 구글 클라우드에서 10년 가까이 성장을 주도했던 앨리슨 왜건펠드(Alison Wagonfeld)를 초대 CMO로 영입했다. 그동안 엔비디아는 별도의 CMO 없이 부사장급 임원들이 마케팅과 홍보를 분담해왔으나, 이번 인사를 통해 마케팅 기능을 최고 경영진 레벨로 격상시킨 것이다. 오는 2월부터 공식 업무를 시작할 왜건펠드는 엔비디아의 마케팅 및 커뮤니케이션 조직 전체를 총괄하게 된다.
단순 하드웨어 기업에서 AI 플랫폼 기업으로
이번 인사는 엔비디아의 정체성이 단순한 게이밍 GPU 제조사를 넘어 AI 풀스택(Full-stack) 플랫폼 기업으로 완전히 변모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조치다. 현재 엔비디아의 포트폴리오는 CPU, GPU, DPU는 물론 네트워킹 솔루션과 소프트웨어 스택까지 아우를 정도로 방대해졌다. 젠슨 황 CEO가 AI 붐의 아이콘으로 떠오르며 회사의 비전을 제시하는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고 있지만, 개별 제품과 플랫폼의 복잡한 가치를 세밀하게 시장에 전달하기에는 물리적인 한계가 따른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거대해진 기업 규모에 걸맞은 체계적인 커뮤니케이션 전략이 필요해진 시점이다.
공급 부족 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경쟁 국면
마케팅의 중요성이 대두된 배경에는 시장 환경의 변화도 자리 잡고 있다. 지난 몇 년간은 AI 학습용 하드웨어 수요가 공급을 압도했기에 별다른 마케팅 없이도 제품이 팔려나갔다. 하지만 앞으로는 추론(Inference) 시장이 커지면서 전문적인 경쟁자들이 대거 등장하고 경쟁이 심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스타트업부터 하이퍼스케일러, 정부 기관에 이르기까지 고객군이 세분화됨에 따라 각기 다른 메시지와 접근 방식이 요구되는 상황이다. B2B 및 클라우드 서비스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왜건펠드의 영입은 이러한 미래 전장을 대비하기 위한 전략적 포석으로 풀이된다. 왜건펠드 역시 이번 이직을 두고 “AI 분야의 리더인 구글에서 또 다른 리더인 엔비디아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라며 두 회사 간의 파트너십은 여전히 공고할 것임을 시사했다.